라. 바둑의 역사
1. 전문기사의 등장
조선시대에서 바둑은 개인적인 소일거리였고, 다수가 모이는 경우에도 개인적 친분관계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920년대가 되면서 일부 신문들이 유명 기사들을 초대하여 대국하게 하고 그 기보와 관전기를 신문에 게재하거나 전국의 고수들을 한 자리에 모아 바둑대회를 개최하는데 이를 통해 실력이 있는 기사들은 바둑을 두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아주 극소수였지만 전문기사라 할 만한 사람들이 생겨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이다.
동아일보에 실린 ‘전조선위기 선수권대회’ 관전기 스크랩 기사
먼저 1926년에 <중외일보>가 순장바둑 대국보를 게재하였고, 이후 몇몇의 신문이 그 예를 따랐으며, 1937년에는 <동아일보>가 ‘전조선위기선수권대회’와 ‘국수쟁패전’을, <매일신보>가 ‘전조선국수선정위기대회’를 시작하는 등 대국의 기회가 대폭 늘어난다.
각 대회의 상금도 1등 100~150원, 2등 50~100원, 3등 20~50원 등으로 적지 않았고,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신문에 초대되어 대국하는 경우 어느 정도의 대국료를 받았을 것이므로 입상할 실력을 가졌다면 넉넉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생계유지는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실력자 중 유진하와 권병욱 두 사람이 있는데, 대국자로서뿐만 아니라 관전필자로도 유명했다. 유진하는 ‘현호실거사(賢乎室居士)’라는 필명으로 <동아일보>에서, 권병욱은 ‘운심각주인(雲深閣主人)’이라는 필명으로 <매일신보>에서 관전기를 담당하였는데, 이는 대국하는 것 이외에도 바둑을 직업으로 삼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의 순장바둑 모습. 초창기 신문 관전기의 지평을 이끈 '유진하' 가 신문에 기고한 바둑
수필이며 '유진하'는 1950년 대한기원 초단이 되었고 한국 현대바둑 초창기에 활동하였다.)
2. 바둑 제도의 발전
원래 조선에는 지금과 같은 ‘단(段)’이라는 체계가 없었다. ‘단’은 일본의 제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생겨난 것으로 1950년에 열린 ‘단위결정대회’가 그 시초다. 이전까지 조선의 기사들은 ‘급(級)’으로 실력 차를 표시하였고, 특별히 이름난 기사들의 경우에는 ‘국수(國手)’, ‘도기(道棋)’, ‘면기(面棋)’ 등으로 불렀다.
1926년 12월 5일자 <중외일보>는 당대 기사들의 기력을 정하여 발표하면서 ‘일수(一手)’, ‘일수에 다음가는 수(手)’, ‘다음에 다음가는 수’ 등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비록 이처럼 실력을 구분하는 체계조차 확립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러한 제도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되고 있었고, 1930년대가 되면 조금씩 제도 확립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된다.

바둑교수소나 구락부와는 별도로 협회로서의 기원도 생겨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협회식 기원은 ‘경성기원(京城棋院)’
이다. 1930년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별장에 개설된 경성기원은 노사초, 채극문, 유진하, 정규춘 등 당대 일류 고수들이 추진하였고 후원자들로부터 300원을 모금하여 운영하였다고 한다.
1934년에는 보다 체계를 갖춘 조직인 ‘조선기원’이 설립되는데, <조선일보> 1934년 1월 17일자에 실린 창립소식과 설립취지서에 따르면 채극문, 정규춘, 유진하 등이 발기인이며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미력을 살피지 아니하고 하나의 기원을 설립하여 장차 오로지 연구에 정진하고자 한다. 다행히도 관심 있는 분들의 찬동과 특별한 후원에 힘입어 이렇게 꾸몄고 앞으로의 유지에 대하여는 점진적으로 진행중이라 하였다.
1937년에는 또 다른 경성기원이 문을 연다. 8월 하순에 창립총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300원의 희사금을 모집하였으며,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천도교 대표이자 <매일신보> 사장이었던 최린(崔麟, 1878~1958)이 고문에 추대되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전문기사를 선발하는 제도가 정착되거나 기사들이 안정적으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활동의 종류나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개인 후원자의 호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와 비교하여 본다면 바둑이 제도권 내에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바둑규칙과 용어의 변화 및 우리나라 고유 바둑인 순장바둑의 폐
<매일신보> 1918년 6월 7일자 ‘사고(社告)’는 총독부의 일본어 기관지인 <경성일보> 주최의 바둑대회를 홍보하면서 “9일부터 경성 매가(梅家)에서 위기대회를 개최할 터인데, 조선인으로서 내지(內地)식 기(碁)에 난숙한 이는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내지식 기(바둑)’이라 하면 일본식 바둑이자 현재 우리나라에서 두어지는 바둑을 말한다. 원래 조선에서 두던 바둑은 일본과는 다른 규칙을 가진 ‘순장바둑’이었다. 193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바둑전문 잡지이자 유일한 순장바둑 교재인 『신정기보(新訂碁譜)』가 출간되기도 한다.

(1934년 발행한 국내 최초의 바둑월간지인 ‘신정기보’의 모습. 1933년 11월 경성기원에 나오는 국수급 기사들이 경성위기연구소를 만들고 후진들을 가르치기 위해 발간했다. 순장바둑의 맞바둑 기보와 접바둑 기보, 그리고 순장바둑 정석 등이
게재되어 있다.)
그러나 1937년에 이르면 순장바둑은 일본식 바둑에 밀려 폐지되기에 이른다. 1937년은 일제가 중국과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내선일체’와 ‘민족말살정책’ 등을 본격화하는 시기이므로 민간의 상황이 어떠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동아일보> 1937년 12월 30일자에 실린 유진하의 ‘기계 1년의 회고’를 보면 “(1937년) 1월 1일에 원남동 조선기원에서
채극문, 정규춘, 윤주병 제씨가 도소주를 나누고 원단의 첫 감상으로 재래 화점식(순장바둑)을 폐지하기로 결의하였”으며
그 이유는 순장바둑은 미리 바둑판 위에 치석을 놓고 시작하기 때문에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초반을 짜는 제 제한이 있기에 순장바둑이 빈 바둑판에서 시작하는 일본바둑에 비해 천재를 키워내는 데 제약이 있다고 생각한것이다.
이와 함께 1937년 이후에 개최된 바둑대회들은 모두 일본식 바둑으로 두어졌으며, 신문의 관전기에서도 ‘고미’1),
‘중압승’2)과 같은 일본어 바둑용어가 사용되었고, 덤도 4.5집이 주어져 일본과 조선의 바둑의 차이가 공식적으로는 사라지게 된다.
한국의 근대 바둑은 폭넓은 대중을 얻었고, 신문이나 바둑대회, 그리고 교수소나 구락부 같은 바둑의 재미를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고, 기사들은 점차 전문화되었으며, 협회로서의 기원제도도 마련해 가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고유의 바둑인 순장바둑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1) 고미 - '덤'을 뜻하는 일본식 바둑용어
2) 중압승 - '불계승'을 뜻하는 일본식 바둑용
'바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둑의 역사 6 (일본편 2) (2) | 2024.12.02 |
---|---|
바둑의 역사 5 (일본 편) (2) | 2024.12.01 |
바둑의 역사 3 (근대바둑의 성립과 발전, 한국 근대 바둑의 시작) (6) | 2024.11.30 |
바둑의 역사 2 (Why, How, where? 가장 오래된 기보는?) (3) | 2024.11.28 |
바둑의 역사 1 ( who, when?) (0) | 2024.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