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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바둑의 역사 6 (일본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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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일본 바둑의 역사

   1. 근대적 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들

  일본에는 바둑이 전문화된 역사가 오래된 만큼 유명한 기사들도 많다.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3명의 일본 통일의 영웅들에게 바둑을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초대 혼인보 산사, 고금을 통틀어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고 일컬어질 뿐만 아니라 과거 힘에 의거한 바둑에서 합리적 계산을 통한 근대적 바둑으로의 전환을 주도하였고, 단위제도를 창안한 것으로 알려진 제4대 혼인보 도사쿠, 19세에 혼인보의 후계자로 지명되고 이후 13년 간 총 19국의 오시로고에서 전승을 거두었으며 ‘슈사쿠 포석’이라는 근대 포석의 기초를 마련한, 만화 『고스트 바둑왕』에서 ‘사이’가 히카루 이전에 머물렀던 기사 슈사쿠 등 모두 소개하자면 리스트가 상당히 길어질 듯하다. 언젠가 그들을 자세히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일본 바둑의 근대적 제도화에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일본의 혼인보 산사 모습.

슈사쿠 포석의 틀을 마련한 '슈사쿠'

 

가. 호엔샤 초대 사장 혼인보 슈호 (1838~1886)

슈사쿠가 혼인보의 대를 잇지 못하고 1862년 32세의 나이에 콜레라로 요절하자, 당시 이미 6단에 올랐던 슈호는 당연히 자신이 혼인보 가문의 후계자로 지명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제12대 혼인보 죠와()의 미망인이 그의 후계계승을 반대하여 결국 당시 나이 열다섯에 단위도 3단밖에 되지 않던 슈에츠()가 후계자가 된다.

이로 인해 혼인보 가문 내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야망을 펼칠 수 없다고 생각한 슈호는 이듬해 가문에서 탈퇴하고 십 수 년을 야인으로 지내다가 1879년 4월, 역시 혼인보 출신인 나카가와카메사부로()와 이노우에 출신 고바야시테츠지로() 등과 함께 호엔샤를 설립한다.

 

슈호는 호엔샤의 초대 사장으로서 앞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제도 개혁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력 또한 당대 최고였음은 물론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사 중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다. 사장의 출중한 실력과 혁신적 제도의 실행 덕에 호엔샤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혼인보 가문은 마침내 그에게 가문을 계승해 줄 것을 제안하였고 1886년 제18대 혼인보가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평생의 소원을 이룬 지 3개월 만에 급사한다.

 

 

 

 

나. 김옥균의 절친 슈에이 (1852~1907)

갑신정변(1884)의 실패 이후 그 주모자였던 김옥균은 10년 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는데, 바둑은 그의 고달픈 망명생활을 달래 준 위안거리이자 대인관계의 수단이었다. 김옥균이 일본에서 교류했던 정치인들 중에는 특히 유명한 바둑의 후원자들이 많았는데, 이노우에카오루(), 고토쇼지로(), 이와자키야타로(), 오쿠보토시미쯔(), 이누카이츠요시() 등이 그들이다. 김옥균이 바둑을 통해 알게 된 인물들 중에서도 제17대와 19대 혼인보였던 슈에이는 특히 관계가 각별하여 그가 오가사하라나 홋카이도 등 도쿄에서 먼 지역으로 유배를 당할 때면 함께 기거하며 바둑모임을 열기도 하였다.

김옥균 모습
슈에이 모습.

 

 

제14대 혼인보 슈와()의 둘째 아들인 슈에이는 10세 때 후계자가 없었던 하야시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15세 되던 해인 1867년 제13대 하야시가 된다. 하지만 호엔샤가 설립되고 본가인 혼인보 가문의 세력이 약화되자 1884년 하야시 가문을 떠나 친동생인 제16대 혼인보 슈겐()에 이어 제17대 혼인보가 된다. 이후 호엔샤와 경쟁하기보다는 상생하는 길을 선택, 슈호에게 제18대 혼인보가 되어 줄 것을 권함으로써 혼인보와 호엔샤 간의 극적인 화해를 성사시켰으나, 슈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다시 제19대 혼인보가 된다.

김옥균이 생전에 사용했던 바둑판. 옛날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깔끔하고 고급스럽다. 현재 한국기원 내 보관중

 

마지막 혼인보 슈사이 (秀哉, 1874~1940)

사실 바둑팬들에게 ‘혼인보’는 바둑 명문가의 이름이 아니라 일본 최초의 타이틀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이 ‘혼인보전’은 제21대 혼인보이자 역사상 마지막 세습 혼인보였던 슈사이가 혼인보라는 명칭을 일본기원에 양도한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1908년 34세의 나이에 혼인보를 계승하여 30년 간 일본 바둑계 최고의 지위를 누린 슈사이는 1938년 은퇴를 선언하면서 후계자를 지명하는 대신에 일본기원에 혼인보의 명칭을 양도한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39년 일본기원은 도쿄니치니치신문과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의 공동 주최로 일본 최초이자 바둑 역사상 최초의 타이틀전인 혼인보전을 개최한다. 300년 이상 이어져 온 혼인보의 세습이 실력에 의한 타이틀의 쟁취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혼인보 슈사이 모습.

 

한편, 슈사이의 은퇴기념국은 당시 오청원과 함께 가장 촉망받는 젊은 기사였던 기타니미노루와 두어졌는데 이 바둑 또한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다. 64세의 노인과 29세의 청년의 대결, 각자 제한 시간 40시간, 6개월 간 총 20회에 걸친 대국, 늙은 명인의 패배와 그로부터 1년 만에 찾아 온 그의 죽음은 이 은퇴기념국의 관전기를 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타야스나리에 의해 『명인』이라는 소설로도 재탄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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