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일본 바둑의 역사
1. 일본 바둑 근대화와 주요인물
1990년대 이후 한국과 중국에게 밀리기 이전까지 일본 바둑은 실력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최강임과 동시에
전세계 에 바둑문화를 전파한 바둑선진국이었다. 중국의 바둑천재 오청원은 선진바둑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서 유학하여 살아있는 기성(棋聖)이라 불리게 되었고, 한국의 바둑천재 조치훈과 조훈현 역시 일본에서 공부하여 각각 일본과 한국의 최고가 되었다. 일본 바둑이 어떤 과정을 통해 20세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세계최고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는지 그 경위를 알아보자.
2. 근대 제도의 발전과정
일본에서 일종의 전문기사제도가 시작된 것은 센고쿠시대가 끝날 무렵부터이다. 하야시 겜비(林元美, 1778~1861, 제11대 하야시)가 쓴 바둑책 『난가당기화(爛柯堂棋話)』에 소개된 이야기에 따르면, 무로마치 바쿠후를 멸망시킨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서 자신의 부장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당시 최고의 기사로 명성을 떨쳤던 리카이(日海, 훗날 제1대 혼인보 산사가 된다)와 카시오 리겐(鹿塩利賢, 제1대 하야시의 스승이다)의 대국을 관전하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일본을 통일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바둑대회를 개최하였는데, 그가 대회에서 우승한 리카이에게 봉록을 하사한 것이 이후 바둑 명문가들이 생기게 된 효시라 할 수 있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본을 재통일하고 에도(江戶)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혼인보(本因坊)를 필두로 야스이(安井), 이노우에(井上), 하야시(林) 등 4개의 바둑 가문을 이어나갔고, 도쿠가와 막부의 제3대 쇼군이었던 이에미쓰는 오시로고(御城碁)라는 연례 바둑행사를 제도화 시켰으며, 고도코로(碁所)라는 직책을 설치하여 기사들의 단위, 입단과 승단, 대국 등 바둑계 전반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후 각 이에모토는 바쿠후로부터 살 집과 도장(道場), 그리고 봉록을 받는 이외에도 귀족이나 관료 혹은 부유한 상인들을 후원자로 두었으며, 전문기사가 되려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출장 지도대국 등을 통해 수입을 얻는 등 지금의 프로기사와 유사한 활동을 하였다. 일본에서 바둑은 16세기 말, 혹은 17세기 초 무렵부터 이미 상당히 전문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바쿠후가 몰락하자 바쿠후와 귀족관료의 후원, 이에모토와 같은 구제도에 의해 지탱되어왔던 전문바둑계가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오시로고는 이미 유신이 있기 몇 년 전부터 중단된 상태였고, 유신 직후 각 이에모토1) 들은 봉록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은 물론 그때까지 거주하던 집과 도장을 몰수당했으며, 제자들은 각지로 흩어진다.
1) 이에모토 - 다도, 꽃꽂이 등 일본 전통문화와 기예 등의 전승 시스템. 이에모토라고 불리는 스승을 정점으로 제자군을 형성하고 특정한 유파를 발전, 전승하는 제도이다.
하지만 어려움은 잠시, 곧바로 유신으로 권력을 잡은 정치인들과 재계의 실력자들로 후원자집단을 꾸린 일본바둑계는 유신 후 10여년만인 1879년, 일본 최초의 근대적 바둑협회라고 할 수 있는 호엔샤(方圓社)를 설립한다. 기존 이에모토들 제도에 대항하는 기사들로 구성된 호엔샤는 권위의 세습을 거부하고 새롭게 단위를 정하였으며, 전문기사를 양성하는 연구생 제도를 두었고, 잡지를 발행하거나 신문 대국을 하는 등 근대적 제도의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과거와는 달리 일반대중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을 시도하였다.
물론 이처럼 호엔샤가 과거에 비해 탈권위적, 수평적, 근대적 조직을 만들었다고는 해도 이 역시 큰 틀에서 보면 폐쇄적인 전문가집단으로서의 성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전문기사로서의 활동은 단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을 때에만 가능했고,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의 관계는 종속적이었으며, 대중을 기반으로 한 재원의 확보보다는 개인 후원자들의 후원이 더 중요했다.
이러한 관행은 호엔샤가 설립된 지 거의 50년이 지난 후인 1924년에 설립되는 일본기원에서도, 그리고 일본기원이 설립된 지 9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호엔샤 설립 후 일본기원 설립 이전까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한 여러 파벌과 단체에서 발행하던 전문기사 인허권, 즉 입단자격은 일본기원이 독점하게 되었고, 일본바둑계를 관장하는 일본기원의 금전적인 이익이나 사회적 권위 역시 일본기원을 움직이는 소수의 유명기사들에 의해 좌우되며, 프로기사들의 활동은 대중보다는 기전을 후원하는 후원사나 신문사의 구미에 맞게 재단되었다.
이러한 일본기원의 독점적 지위에 도전하여 1950년에 오사카와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간사이(關西) 지역 기사들이 설립한 것이 ‘간사이기원’이다. 규모 면에서 일본기원의 지방 분원 정도밖에 안 되지만 지금까지 자체적으로 전문기사제도와 입단제도, 연구생제도 등을 운영하고 있고 기전도 유치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는 물론 국내적으로도 일본기원이 일본 바둑계를 대표하는 단체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한국에 비해 300년 이상 일찍 바둑을 전문화하고 제도화하는 데 성공한 일본의 바둑은 수많은 뛰어난 기사들을 배출하였고,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현재까지도 그 틀이 거의 변하지 않는 기전운영의 방식, 잡지나 기술서적의 형식 등을 만들어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바둑을 정신문화의 하나로 인식하는 일본이 바둑의 스포츠화의 시대에 걸맞은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데에는 이러한 과거의 번영과 공고한 제도의 힘이 이제는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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