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 이어서 1인자의 계보를 이어 왔던 바둑 기사들을 알아보자.
다. 조훈현 (1953~ 현재)
조훈현 9단 하면 떠오르는 것이 최연소 입단이다. 무려 9살이라는 나이에 프로에 입단 한것이다. 이제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에 무려 프로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바둑황제’로 불리는 조훈현은 그 칭호에 걸맞게 화려하기가 비할 데 없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62년 9살의 나이에 입단한 것 뿐만 아니라 입단한 지 약 6개월만인 이듬해 4월에 2단으로 승단, 다시 6개월 뒤인 1963년 10월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스승은 조남철과 조치훈, 그리고 김인 등의 스승인 기타니 미노루가 아닌 오청원과 하시모토 우타로의 스승인 세고에 켄사쿠였다.
1966년 일본기원에서 다시 입단한 조훈현은 1967년 2단, 1969년 3단 승단에 이어 1970년에는 4단으로 승단함과 동시에 당해 승률 88.6%(33승 5패 1빅)로 일본 기도상 신인상을 수상한다. 1971년 5단으로 승단한 후 병역 문제로 1972년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도 촉망받는 신예기사였던 것이다. 1972년은 서봉수가 조남철을 상대로 ‘명인’을 획득하던 해이다. 19살 동갑내기 두 기사는 한 사람은 9살에 입단한 신동이자, 일본 유학 경험만 10년에,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로, 다른 한 사람은 17세 입단에 한국 토박이로 이렇게 만난것이다.
공군 입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방황하던 조훈현이 본격적으로 화려한 경력을 쌓기 시작한 것은 1975년부터다. 이때부터 매년 5~6개의 타이틀을 획득하던 조훈현은 1980년 제1차 전관왕(9관왕)에 오른다. 이후 1982년 한국 최초 9단 승단과 함께 제2차 전관왕(10관왕), 1983년까지 6년 연속 바둑문화상 최우수기사상 수상, 1986년 제3차 전관왕(11관왕) 등 그야말로 기록 제조기였다. 1989년 응씨배 우승은 그때까지 일본과 중국에 비해 국제적 인지도가 심히 낮았던 한국 바둑의 위상을 드높인 위대한 사건이지만 그의 기록표에는 그저 한 줄일 뿐이다.

1992년에는 통산 타이틀 획득 124회로 세계 최고 기록을 수립하였고, 1993년에는 ‘패왕전’을 우승함으로써 한 기전 최다연패 기록인 16연패의 기록을 세웠으며, 1994년에는 후지쓰배를 우승함으로써 세계대회 싸이클링 히트(응씨배, 동양증권배, 후지쓰배)를 달성했다. 만일 자신이 기른 호랑이 이창호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무서운 기세로 그의 타이틀을 빼앗아 가지 않았다면, 통산 160회의 타이틀 획득 수가 훨씬 많아졌을 것이 틀림없다.
라. 이창호 (1975~현재)
6살이었던 1981년 할아버지 이화춘에 의해 바둑에 입문한 이창호는 3년만인 1984년에 조훈현의 제자가 된다. 10세에 부모와 떨어져 일본에서 유학했던 스승이 9세의 전주 출신 소년을 집으로 데려와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방식의 교육은 일본에서는 흔한 일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해 11월, 처음으로 참가했던 입단대회에서 떨어진 이창호가 스승과 같은 나이에 입단하지 못했다고 좌절한 얘기는 노느라 바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사람에겐 먼 나라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창호의 입단이 늦은 것도 아니다. 그의 기록인 11세 입단은 지금까지도 스승에 이어 두 번째다.

하지만 입단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이창호는 ‘청출어람’의 대표적인 예였다. 1989년 14세에 이미 자신의 첫 번째 국내 타이틀을 땄고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92년 동양증권배에서 우승하여 최연소 세계 챔피언의 기록도 그의 것이 되었다. 예선부터 참가하여 결승까지 올라가다 보니 1989년에는 1년 간 111국의 공식대국을 두어 최다대국 기록도 가지고 있고, 연간 최고 승률 기록(88.2%, 75승 10패, 1988년)도, 최다 연승 기록(41연승, 1990년)도 모두 이창호가 세웠다.
입단한 지 10년이 채 안 된 때였던 1994년에 이미 국내 16개 기전을 모두 한 번씩 우승하는 사이클링 히트 기록을 세웠고, 2001년에 이미 통산 100회 우승을 달성, 이듬해인 2002년에 통산 1000승, 2003년에는 세계대회를 독식하는 그랜드 슬램도 달성했다. 심지어 1995년에는 이창호라는 국보급 스타를 위해 국회의원 105명 연대 서명한 전례 없는 병역특례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는 기록마저 있다.
스승 조훈현이 응씨배를 우승함으로써 세계가 한국 바둑을 주목하게 만들었다면, 한국 바둑이 세계 최강이 되는 데 주된 역할을 하였다는 면에서는 이창호는 청출어람의 대명사였다. 개인전에서든 단체전에서든 이창호 한 사람만 남아있으면 그 기전은 우승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런 상황을 중국의 언론은 이백의 시를 차용해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니 천군만마가 소용없다’ 라며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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