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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역대 한국 바둑 1인자의 계보(조남철 9단, 김인9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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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대 한국 바둑 1인자에은 어떠한 인물들이 있을까?

 1). 한국 바둑을 이끌었던 천재적인 기사

역대 한국 바둑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왼쪽부터 조남철 9단, 김인 9단,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 이세돌 9

                                         

한국 바둑계는 여타의 스포츠 분야와 유사하게 주로 한 사람의 천재적 스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한국바둑의 아버지’라 불리며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약 20년 간 1인자로 군림하던 조남철은 자신보다 스무 살 아래인 김인에게 1인자의 자리를 물려주었고, 그렇게 물려받은 자리를 김인은 그로부터 약 10년 뒤 열 살 아래인 조훈현에게 물려준다.

 

조훈현이 거의 모든 기전들을 독식하던 20여 년의 세월 동안 동갑내기 서봉수가 끈질기게 왕좌를 넘보았지만 ‘바둑황제’ 아성은 그의 제자 이창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했다. 조훈현에게 서봉수가 있었다면 이창호에게는 유창혁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또한 이들 2인자들이 때때로 국내기전에서 1인자를 꺾거나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등 기염을 토했지만, 1인자와의 격차는 ‘라이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컸고 끝내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이창호를 왕좌에서 내려오게 할 인물은 새로운 1인자가 될 운명의 이세돌이었다. 한국 바둑계에 춘추전국시대는 없었다. 1인자들은, 마치 서로를 알아보기라도 한 듯, 다음 세대의 왕이 나타날 때까지 굳건히 왕위를 지키고 있다가 오직 왕이 될 인물에게만 그 자리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가. 조남철 9단 (1923~2006)

조남철 9의 전성기는 이제 50년도 훨씬 지난 시절이라 우리에겐 거의 전설에 가깝다. 하지만 “조남철이 와도 안 돼”라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로 해방 후 약 20년 간 조남철은 자타공인의 최고실력자였다.

예나 지금이나 바둑을 좋아하는 아버지들은 대부분 프로기사들의 첫 번째 스승이다. 특히 조남철의 선친인 조봉구는 일치감치 막내아들을 전업기사로 만들고자 했던 듯하다. 1932년, 아직 ‘신포석’이 세상에 등장하기 전, ‘신포석’의 창시자인 기타니 미노루와 오청원이 조선을 방문한다. 당시 조남철의 나이 10세. 바둑을 배우기 시작한 지 겨우 2년이 지났을 무렵으로 실력도 6~7급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들과 기타니 미노루의 7점 지도대국을 성사시킨 사람이 조봉구다. 일본으로 유학을 오라는 기타니의 조언에 아들이 좀 더 크면 보내겠다는 약속을 한 그는, 1937년 소학교를 갓 졸업한 조남철을 기타니의 내제자로 보낸다.

조남철의 내제자 시절 기타니 일가와 함께 찍은 사진. 좌측 두 번째가 스승인 기타니 미노루. 맨 오른쪽이 조남철 9단의 모습.

 

이듬해인 1938년에 일본기원 연구생이 되고, 1941년 조선인 최초로 일본기원 프로기사가 된 조남철은 이때부터 이미 조선 최고가 될 조건을 갖추었다. 조선 땅에도 내로라하는 기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정식으로 바둑을 배운 적이 없었고, 조남철보다 훨씬 연상이었으며, 더욱이 ‘순장바둑’을 두던 사람들이었다. 이미 바둑이 하나의 직업으로 정착된 일본의 시스템 속에서 기량을 갈고 닦은 조남철이 그들을 넘어서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조남철이 공식적으로 선배들을 앞서나가게 된 것은 1950년 6월 20일에 시작된 ‘단위결정시합’에서였다. 이전까지 우리나라에는 ‘단’이라는 것이 없었고 일반적으로 바둑실력은 ‘급’으로 표시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출한 기사들을 ‘도기’나 ‘국수’로 불렀는데 그러한 국수들 사이에 서열을 정하자는 것이 대회의 취지였다.

 

대회의 규정은 기존의 국수들을 초대하여 일률적으로 ‘초단’을 인정하고 총호선으로 리그를 하여 평균 성적이 75점 이상이면 2단, 80점 이상이면 3단을 인허하는 것이었다. 초대 받은 13명의 기사들 중 불참한 4명의 기사를 제외한 9명이 리그전을 펼친 결과 오직 조남철만이 3단을 인허 받았고 나머지 기사들은 그대로 초단에 머물렀다. 조남철이 대한민국 최강자로 공인받는 순간이었다.

 

이후 조남철의 지위는 후배 김인이 등장할 때까지 흔들림 없이 유지됐다. 1956년에 시작된 ‘국수전’에서 우승한 후 9년 간 그 자리를 지켰고, 1958년 시작된 ‘왕좌전’에서 우승한 후 4년 연속 우승, 1960년에 시작된 ‘최고위전’에서 우승 후 7년 연속 우승 등 1960년대 중반까지 그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제1인자였다.

 

나. 김인 9단 (1943~ 현재)

  조남철보다 20년이나 나이가 어린 김인이지만 그가 바둑을 시작한 무렵에도 체계적인 바둑교육시스템은 없었다. “내 또래 이상 나이의 기사들은 바둑을 취미로 배워 프로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들입니다. 바둑이 호구지책이 못 되던 시절이니까요.” 2007년, 김인의 대국보 312국을 정리한 전집이 나왔을 때 <조선일보>(2007.02.24.)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다.

 

그러나 김인은 바둑을 직업으로 삼을 수 없었던 시절에 바둑공부를 위해 전남 강진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다. 아버지를 비롯하여 세 사람의 형들도 모두 바둑을 좋아하는 바둑가족이었다고는 하나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떡잎부터 남달랐던 걸까?  김인은 바둑에 입문한 지 4년, 서울로 유학 온 지 3년만인 1958년에 입단에 성공한다.

 

1961년, 매년 승단하여 이미 4단이 된 그는 같은 해 ‘최고위전’에서 준우승을 하는 등 이미 조남철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주변에선 유학 경험이 없는 그에게 ‘네가 성적을 내고는 있지만 일본에 가면 연구생 최고 수준에도 못 미칠 것’(<동아일보>, 2014.08.06.)이라는 말을 자주했고, 이것이 자극이 되어 1962년 3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후지사와 슈코 9단과의 시험기, 그리고 스승인 기타니 미노루의 주선으로 일본기원 3단을 인정받은 그는 1년 8개월 동안의 일본 체재 중 8할 가까운 승률을 올리며 한국 기사의 자존심을 세웠다.

김인(右)과 조훈현의 제14기 최고위전 대국 모습. 3-0으로 승리한 조훈현이 최고위전 첫 우승을 차지하며 권력의 이양을 알렸다. 이후 조훈현은 19기까지 6연패를 했고 다시 21기부터 27기까지 8연패를 하며 독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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