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응씨배의 등장과 한국 바둑의 위상
녜웨이핑이 이끄는 중국 팀의 연이은 승리로 중국인들의 바둑에 대한 자신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대만의 사업가이자 40년대부터 바둑을 후원해 온 잉창치가 세계프로바둑대회의 아이디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은 이즈음이었다. 잉창치는 수많은 잡지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점을 강조한다. 오랜 시간 동안 일본은 경쟁자 없는 최강이었으나 이제 일본의 일류기사와 겨루어도 손색이 없는 중국인 기사들이 많아졌다. 여기에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만 출신 기사들, 린하이펑, 왕리청(王立誠), 왕밍완(王銘玩) 등이 가세하면 흥미진진한 세계대회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그 해, 4년 마다 한 번씩 개최된다는 점 때문에 바둑올림픽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제1회 응씨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중국이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었다. 국적에 따라 참가 선수를 배정하였으므로, 초청된 16명의 기사 중 한국 선수는 조훈현과 조치훈 두 사람이었으나, 소속기원에 따라 나누면 사실상 한국 선수는 조훈현 한 사람. 당시 조훈현과 수많은 기전에서 우승컵을 다툰 서봉수가 초대받지 못한 것은 한국 바둑의 국제적 위상이 얼마나 낮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조훈현은 4강전에서 대만 바둑계의 영웅인 린하이펑을, 결승에서는 대륙의 영웅 녜웨이핑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잉창치의 예상 시나리오는 4강전까지 완벽했으나, 조훈현이라는 복병을 간과했던 것이다.
이후 응씨배에서는 제2회는 서봉수가, 제3회는 유창혁이, 제4회는 이창호가 우승을 거두었고, 중국 기사의 우승은 창하오에 의해 제5회(2005년)에 와서야 실현되었다. 1997년에 타계한 잉창치는 결국 염원하던 중국의 세계제패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의 우위는 응씨배 이외의 대회에서도 꾸준했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은 이제 일본이 아니라 한국을 꺾어야만 세계최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4. 중국 바둑으로부터의 패러다임
이미 1960년대부터 바둑 종주국으로서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노력해 온 중국은 1980년대 일본을 따라잡는 데 성공했으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한국에게 세계 최강의 자리를 빼앗긴다. 더욱이 이 새로운 강자는 과거 일본을 타도하기 위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쉽게 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1990년대 중반부터 이전까지 없었던 여러 가지 혁신적 방법들을 선보인다.
지금은 한국기원에서도 매달 발표하고 있는 기사들의 랭킹은 1995년 중국 국가체육위원회가 처음으로 실시한 것이다. 최근 여류기사들에게까지 확대된 단체리그전 방식의 대회 역시 1999년 중국에서 처음 시작된 중국바둑리그가 그 시초였다. 2002년부터는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도록 유도하기 위해 특별 승단제도를 시작하였는데, 이것 역시 이후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었다. 국가대표팀을 구성하고 감독을 두어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한 것도 중국이 처음이며, 작년부터 한국기원에서도 이 방식을 차용하여 선수들의 관리를 시작했다.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으로 중국인들의 애초의 기대보다 20여년 늦게 중국바둑의 중흥기를 맞이하긴 했지만, 덕분에 이와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중국의 좋은 예는 지체 없이 받아들여 개선함으로서 과거 일본과 같이 호락호락 최강의 자리를 내 주지 않고 있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최근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일본까지 가세하여 선의의 경쟁을 함으로써 세계 바둑계가 함께 성장해 나아감을 기대해보자.
'바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대 한국 바둑 1인자의 계보(조훈현, 이창호) (2) | 2024.12.09 |
---|---|
역대 한국 바둑 1인자의 계보(조남철 9단, 김인9단) (4) | 2024.12.09 |
바둑의 역사 8 ( 중국 2) (3) | 2024.12.07 |
바둑의 역사 7 ( 중국 편) (5) | 2024.12.04 |
바둑의 역사 6 (일본편 2) (2) | 2024.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