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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세계 바둑대회 역사와 주역들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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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바둑대회 역사

  바둑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중-일 등 주요 국가들이 제각기 ‘각개약진’하는 구도였다. 물론 비공식 교류나 이벤트가 있었지만 제도적 틀을 갖춘 행사는 아니었다. 또한 당시 바둑은 일본이 절대적 메카로 자리 잡은 탓에 바둑 승부의 국제화 필요성 논의도 지연됐다. 하지만 1985년 시작된 중일 슈퍼대항전을 통해 녜웨이핑()을 앞세운 중국의 바둑 실력이 입증되면서 바둑의 국제화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대만 출신의 기업인 잉창치(응창기)씨가 1988년 제1회 응씨배 세계선수권대회를 기획했다. 당시만 해도 천문학적이라고 할 만한 40만 달러의 우승상금, 4년 주기의 ‘올림픽형’ 방식 등 의욕 넘치는 플랜이었다.

 

그러나 이 대회는 몇 달 차이로 ‘제1호 국제바둑 대회’의 영예를 놓치고 2호로 밀리고 마는데, 응씨배 출범 소식을 접한 일본이 서둘러 후지쓰배를 창설한 것이다. 아무튼 두 대회가 경쟁적으로 문을 열어젖힌 1988년은 바둑의 본격 국제화 원년으로 기록됐다. 27년의 국제바둑 경쟁사를 기전()1)과 기사() 두 개의 시각으로 정리해 본다.

 

기전 1) - 공식 타이틀이 걸린 바둑대회. 한국 최초의 기전은 1956년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국수 제1위전’으로 ‘국수전’의 전신이다.

가. 기전(棋戰)

  1) 후지쯔배

  일본 바둑 영욕()의 역사가 함께 녹아있는 상징적 대회다. 세계 바둑사상 최초의 국제 제전으로 ‘바둑 종주국‘의 자존심 충족에 큰 몫을 했지만, 한편으론 2011년 24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배경도 자랑스럽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 불황과 자국 기사들의 끝없는 부진이 원인이었으니 자존심 상하는 결말이었을 것이다.

초창기 5년간 일본 기사들이 독점했으나 이후엔 한국의 안방이었다. 한국이 98년 11회 대회부터 2007년 20회 대회까지 기록한 국제대회 10연패() 기록은 앞으로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기사끼리의 결승전도 8번이나 나왔다. 이세돌 박영훈 박정상 강동윤 박정환이 이 대회를 통해 첫 세계 우승을 맛봤다. 2011년 동북지역 대지진 참화로 일정 연기 및 단축, 규모 축소 등 고육책 속에 마지막 대회를 마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2) 응씨배

  대만 부호 잉창치씨는 바둑 사적()으로 보자면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바둑 연구가이자 분석가였다. 덤(흑이 지불할 핸디캡)만 하더라도 한-일이 채택해온 5집 반~6집 반 대신 8집을 채택했다. 제한시간 역시 초읽기를 없애고 각자 3시간 30분을 다 쓰면 35분당 2점 벌점, 2회 초과시 시간패란 독특한 룰을 창안했다. 그는 계가()도 자신이 고안한 전만법이란 규칙을 적용토록 했다.

 

40만 달러란 우승상금은 특히 1990년~2000년대 무렵엔 상당한 거액이어서 바둑의 위상 제고와 붐 조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 수혜자는 대부분이 한국기사였다. 7회 대회를 치르는 동안 한국이 초기 4연패() 포함 5회 우승했고 중국 기사는 두 번 정상에 섰다. 한국 기사들이 국제바둑대회 초창기 일본과 중국(대만) 주최 양대 국제대회를 모두 휩쓸며 한국 바둑 황금기를 구현했다는 사실은 음미할 만하다.

 

3) 동양증권배

  후지쓰배와 응씨배 출범 이듬해인 1989년 한국도 바둑 국제화 대열에 합류했다. 최초의 한국 주최 국제대회로 출범한 동양증권배는 주최국 프리미엄으로 국내 기사 출전 기회를 넓혀주었고, 그것이 한국 바둑이 중-일의 틈을 뚫고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는 큰 기회가 됐다. 국제대회라고 보기엔 미흡한 수준이었던 초기 2회까지 포함하면 한국이 8회, 중국은 1회 우승했다. 동양증권배는 1998년 외환위기의 찬바람 속에 제9회 대회를 끝으로 폐지됐다.

 

4) 삼성화재배

1996년 출범하면서 잉씨배와 같은 40만 달러를 내걸었던 삼성화재배 우승상금은 1년 뒤 2회 때 3억원, 이후 3회부터는 줄곧 2억원을 고수하다 2012년 17회 때부터 3억원으로 환원됐다. 통합예선전, 와일드카드제 도입, 점심시간 폐지, 외국인 및 여성 쿼터 배정 등 매년 혁신안을 들고 나오면서 한국바둑이 전성기를 구가하는데 한 축을 맡았다.

삼성화재배 결승전은 반드시 한국 기사와 외국 기사가 결승전을 치른다는 징크스를 굳혀왔다. 19년 간 대회를 치르는 동안 17회를 한-중 또는 한-일 전으로 치렀다. 예외는 12회(이세돌-박영훈), 14회(쿵제-추쥔) 두 차례에 불과하다. 이 과정 속에서 한국 12명, 중국 5명, 일본 2명의 우승자가 배출됐다.

 

 

5) LG배

기업 라이벌 관계인 LG와 삼성은 국제기전도 96년 거의 동시에 창설하면서 경쟁관계를 유지해왔다. 삼성화재배가 매년 변화를 추구하는데 반해 LG배는 3시간제 정통스타일 고수 등 보수적 운영이 특징이다. 하지만 1998년(3회) 때 기존의 5집 반 덤을 버리고 6집 반 시대를 처음 열었고, 지금은 많은 국내외 대회서 채택하는 흑백 선택권 방식을 2005년 먼저 도입했다.

국가별 쏠림 현상도 삼성화재배와 대조적이다. LG배 19년 동안 같은 기원 소속 기사가 결승에서 맞붙은 것은 10번에 이른다. 한-한 결승전이 6번, 중-중 결승전이 4번 나왔다. 하지만 그 결과 국가별 우승자 배출 수는 한국과 중국이 8회로 같고 일본이 2회, 대만이 1회 우승하는 절묘한 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19회 LG배 결승전에서는 국내랭킹 1, 2위인 박정환 9단과 김지석 9단이 형제대결을 펼치면서 6년 연속 중국에 넘겨줬던 우승컵을 되찾아왔다.

 

 

 나머지 대회들과 기사들은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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