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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바둑의 역사 7 ( 중국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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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현대 중국 바둑의 흐름

   1. 일본과의 교류를 통한 중국 바둑의 발전

    중국 바둑은 그 역사가 깊은만큼 강자들이 즐비하고, 바둑인구 역시 한국과 일본이 상대가 안될정도로 많다.  2013년에는 개인전으로 치러진 세계대회 6개의 우승컵을 모두 가져갔고, 2014년, 2015년 2년 연속으로 단체전 세계대회인 농심배에서도 우승을 거두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약 10년 간 부동의 세계최강이었던 한국바둑이 200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중국에게 위협을 받더니, 그로부터 약 10년 만에 최강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다른 많은 분야에서처럼 바둑에서도 일본▷한국▷중국의 순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2015년 3월 치러진 제16회 농심배에서 한국의 최종 주자로 나선 김지석(左)이 중국의 롄샤오에게 패하며 중국이 2년 연속 농심배 우승컵을 가져갔다.

 

하지만 중국이 바둑에서 헤게모니를 잡은 것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중국은 바둑의 발상지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나라 때부터 청나라 중기까지 수많은 실력자들을 배출하였고 현재까지도 유효한 바둑 기술서적을 출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미 당나라 때 궁정에 바둑을 전문으로 하는 기대조()라는 직책을 두었을 정도로 선진적이었고, 바둑책의 경우 대표적인 것만 꼽아 보아도, 송대의 기보집인 『망우청락집』, 원대의 사활묘수풀이집인 『현현기경』, 명대의 끝내기 비법들을 모은 『관자보』, 청대의 유명 기사들의 기보집인 『기청하관혁선』 등 그 수가 상당하다.

 

혼인보를 위시한 4대 가문을 중심으로 일본의 바둑이 급성장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일본 바둑의 역사가 유명해진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바둑계가 발 빠르게 근대적 제도들을 확립하고 바둑의 직업화, 전문화, 산업화의 길로 나아가면서 자신들의 역사를 실제보다 더 멋지게 포장한 부분이 없지 않다.

 

반면, 비슷한 시기 중국은 엄청난 사회변동을 겪느라 바둑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청나라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외세의 침입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 그로 인한 청의 몰락과 신해혁명, 뒤따른 군벌들의 난립과 일본과의 전쟁,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 등 중국은 100년 가까이 격동의 세월을 보냈다. 그 사이 청나라 말기의 고수들은 모두 늙거나 저 세상으로 떠났고, 오청원과 같은 천재 소년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21세기도 십 여 년이 흐른 지금, 중국은 약 150년 만에 다시 찾아 온 바둑의 중흥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2. 중일 바둑 교류의 역사

베이징의 중국기원 현관에는 천이()1)의 흉상이 놓여있다. 중국 외교부장, 부총리 등을 역임한 천이야말로 중국 현대바둑의 아버지라고 할 만하다. 중일 간의 바둑교류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도, 천주더()나 녜웨이핑()과 같은 제1세대, 제2세대 기사들이 바둑공부에 매진하여 훗날 일본을 꺾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천이의 공적, 사적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이(毅)1) - 천이(陳毅, 1901~1972). 중국의 정치가. 192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 상하이 시장이 되어 중국 동북지역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1958년 외교부장, 1965년 국무원 부총리, 외교부장 등으로 강력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신랄한 비판을 받고 1969년 제 9차 당대회에서 모든 공직을 박탈당했다.

 

중국기원 내 천이 흉상 모습.

 

 

1952년 창설된 국가체육운동위원회는 1956년 정식으로 바둑의 진흥을 국책의 하나로 삼고 체육경기 중 하나로 등록시킨다. 같은 해 북경기예연구사()를 설립하면서 천이는 “중국은 바둑의 발상지이지만 현재의 실력으로는 일본을 이기지 못한다. 우리는 일본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바둑이 융성해야 나라가 산다”며 바둑이 중국과 일본의 자존심이 걸린 분야임을 천명한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현대 바둑은 일본을 타도하는 것을 1차 목표로 하여 발전하였던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문화교류가 시작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가장 먼저 교류의 물꼬를 튼 것은 공연계로, 1955년 일본 가무극단이 중국에서 공연하고, 이듬해인 1956년 ‘중국평극단’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당시 단장이었던 메이란팡()2)이 바둑을 좋아하여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중국 출신 기사 우칭위엔()을 방문하였고, 천주더()와 천스밍()이라는 두 소년 기사를 우칭위엔의 제자로 보내기로 약속하였으나, 1958년에 발생한 “나가사키 국기사건”3)으로 이내 양국 관계가 나빠져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메이란팡2) 메이란팡(梅蘭芳, 1894~1961). 중국의 경극(京劇) 배우로 용모와 연기력이 뛰어났으며 경극에 현대적 색채를 가미하였다. 중국혁명과 항일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중국 희곡연구원 원장, 전국인민대표직에 있었다.

 

나가사키 국기사건3) 나가사키 국기사건(長崎国旗事件). 1958년 5월 2일, 나가사키에 있는 하마야백화점에서 일중우호협회 나가사키 지부 주최로 개최된 중국 우표박람회 당시 회장 입구부근에 놓여있던 중국의 오성홍기에 대해 대만(중화민국) 영사관에서 항의하고, 우익단체소속의 남자가 난입하여 국기를 훼손한 사건.

 

다음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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