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현대 중국 바둑의 흐름
2. 본격적인 중일 바둑 교류의 흐름
본격적인 중일 간의 바둑교류는 1959년 중국을 방문한 일본 자민당 참의원 마쓰무라(松村謙三)4)와 천이의 회담으로 성사되었다. 마쓰무라가 “6억 중국국민에게 바둑을 보급하기 위해서라면 중국에 뼈를 묻겠다”라는 세고에(瀨越憲作)5)의 말을 당시 부총리였던 천이에게 전하자, “바둑은 정치와는 일절 무관한 것으로 일본 측에서 교류를 해 준다면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회답하였다 한다. 이리하여 일본의 바둑 방문사절이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것이 1960년, 중국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되기 12년 전의 일이다.
4) 마쓰무라 켄죠(松村謙三, 1883~1971)
5) 세고에 겐사쿠(1889~1972). 일본 프로기사로, 중국 천재 바둑기사 였던 오청원과 조훈현의 스승.
일본 측은 일류기사들을 선별하여 방문단을 구성하였고, 중국에서도 공항에 환영인파가 몰려들고, 북경을 비롯하여 상하이, 항저우 등 지역을 순회하며 대국을 벌이는 동안 관전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등 교류전에 대한 관심도가 양측 모두 매우 높았다. 당시 일본 측 단장이었던 세고에는 잡지 기고문에서 “장래에 중국이 일본의 수준만큼 올라와서 국제경기를 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는 감상을 피력하였으나, 그것이 실현되는 데는 2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2년 연속 일본 선수단이 중국을 방문한 후 1962년, 처음으로 중국 선수단이 일본을 방문한다. 수교상태가 아니었던 까닭에 선수단은 먼저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입국한다. 중국 측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체육총회부주석 이몽화(李夢華)6)를 단장으로 하여 전국체육총회주석, 대외문화협회 부비서장 등 기사 이외의 인물들도 대거 파견하였고, 일본 측에서도 하네다 공항에서의 환영,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한 동경 아사히신문사 사옥에서의 리셉션, 일본 내 여러 우호단체들과의 만찬 및 기념대국 등 문화교류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큰 행사로 치러졌다.
6) 이몽화(李夢華, 1922~2010). 후에 국가체육운동위 주임 역임함.
대국 장소도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동경, 오사카, 교토 등 여러 도시를 순회하였고 기간도 3주나 되었다. 1963년과 1965년, 그리고 1966년 연말에는 일본이, 그리고 1964년과 1966년 봄에는 중국이 일본을 방문하는 등 지속적인 양상을 보였던 중일 간의 바둑교류는 그러나 중국의 문화혁명으로 인해 1966년을 끝으로 중단되고 만다. 1966년 11월에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했던 일본 기사들은 곳곳에 걸려있는 “중국공산당만세”, “모주석만세”, “미국제국주의필패” 등의 현수막과, 홍위병들이 행진하는 모습, 그리고 천안문 광장에 모인 백만 인파를 보았다고 증언한다.
문화혁명으로 중단된 교류가 재개된 것은 1972년 두 나라 간의 정식 수교가 이루어진 이후였다. 7월에 국교가 정상화되고 3개월 만인 10월 9일, 일본에서는 ‘일중국교회복을 축하하는 바둑계의 모임’이 개최되었다. 정치인과 문화계, 재계, 바둑계 관계자 약 150인이 모인 이날 모임에서 “중국과의 바둑교류를 희망하는 일본국민의 염원을 담아 하루빨리 교류를 재개하자”는 메시지를 중화전국체육총회에 전달한다.
이듬해인 1973년 저우언라이(周恩來)의 관심 하에 중국 최초로 ‘국가위기집훈대’7)가 조직되고, 4월에는 중일우호협회의 일본 방문에 당시 중국 최고의 기사였던 천주더가 역시 저우언라이의 주선으로 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일본 기사들과 대국을 가졌다. 7월부터는 본격적으로 교류가 시작되어 일본위기사절단이 일중우호협회와 요미우리신문의 후원을 얻어 중국을 방문한다. 이후 1974년 4월 중국사절단의 일본방문 등 격년으로 상대국을 방문하며 1992년까지 총20회의 교류전이 진행된다. 7) 일종의 국가대표팀.

한편, 60년대의 교류와는 달리 새로 시작된 교류전에서는 일본의 우세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첫 2회 동안 고전을 하던 중국이 76년부터 반격을 시작하는 것이다. 당시 녜웨이핑이 후지사와, 이시다 등 일본 최정상 기사들을 꺾었고, 몇 년 뒤 녜웨이핑과 결혼하는, 역시 당대 최고의 여류기사 콩샹밍(孔祥明)도 7전 전승을 거두어 일본 바둑계를 놀라게 한다. 이후 중국의 실력은 해를 거듭할수록 강해져 1984년부터는 대회의 명칭도 친선의 의미를 담은 ‘교류전’에서 ‘결전(決戰)’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승부를 다투게 되나 결과는 역시 중국의 승리였다.
녜웨이핑에게 ‘철의 수문장’이라는 별명과 함께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 준 ‘일·중수퍼대항전’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농심배’ 등의 단체전에서 현재까지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승발전’방식의 수퍼대항전은 1985년, 1986년, 1987년 3년 연속 중국의 승리로 마감되었다. 녜웨이핑은 이 세 번의 승발전 모두에 주장으로 출전하여 중국팀의 승리를 견인했고 중국 체육계의 영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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