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썸네일형 리스트형 세계 바둑대회 역사와 주역들을 알아보자 2 6) 춘란배이름에서 추측할수 있듯이 순수 중국 자본이 처음 스폰서를 맡은 국제 기전이다. 1999년 닻을 올린 후 변함없이 15만 달러의 우승상금을 고수하고 있다. 격년제 방식으로 9회까지 치른 결과 한국 5명, 중국 3명, 일본 1명이 우승했다. 구리(古力)와 저우루이양(周睿羊) 등 두 중국 기사가 올 봄 제10회 대회 결승 3번기를 치르고 나면 중국의 춘란배 우승자 수는 4명으로 늘어난다. 7) 바이링배-몽백합 경제력 신장에도 불구하고 국제기전 창설 없이 한-일 양국 주최 대회에 편승만 한다는 핀잔을 듣던 중국이 2012년부터 두 대회를 연이어 창설했다. 180만 위안의 우승상금, 60만 위안의 준우승 상금과 함께 격년제 방식, 통합예선 실시 등 많은 부분서 두 대회는 흡사하다. 서로를 의식하고 있.. 더보기 세계 바둑대회 역사와 주역들을 알아보자 1. 세계 바둑대회 역사 바둑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중-일 등 주요 국가들이 제각기 ‘각개약진’하는 구도였다. 물론 비공식 교류나 이벤트가 있었지만 제도적 틀을 갖춘 행사는 아니었다. 또한 당시 바둑은 일본이 절대적 메카로 자리 잡은 탓에 바둑 승부의 국제화 필요성 논의도 지연됐다. 하지만 1985년 시작된 중일 슈퍼대항전을 통해 녜웨이핑(聶衛平)을 앞세운 중국의 바둑 실력이 입증되면서 바둑의 국제화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대만 출신의 기업인 잉창치(응창기)씨가 1988년 제1회 응씨배 세계선수권대회를 기획했다. 당시만 해도 천문학적이라고 할 만한 40만 달러의 우승상금, 4년 주기의 ‘올림픽형’ 방식 등 의욕 넘치는 플랜이었다. 그러나 이 대회는 몇 달 차이로 ‘제1호 국제바둑 대.. 더보기 바둑 격언 속에 들어있는 인생의 의미(위기십결, 위기오득) (下편) -完- 4) 棄子爭先(기자쟁선) -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선수를 잡아라. 돌 몇 점을 희생하더라도 선수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 선수란 주도권을 잡기 위해 먼저 착점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기자쟁선이 강조하는 전략은 ‘버림돌 작전’ 쉽게 말해 희생타를 써서 이익을 보는 것을 말한다.‘하수는 돌을 아끼고 상수는 돌을 버린다’는 말이 있는데, 소임을 다한 돌은 그 숫자가 많더라도 가치가 적고, 상대를 차단하고 있거나 대세의 요처는 비록 한 점이라 해도 그 가치가 큰 것이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요구되는 전략이다. 5) 捨小就大(사소취대) -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눈앞의 작은 이득을 탐내지 말고 대세를 넓게 보며 움직여야 한다. 말은 쉽지만 막상 바둑을 두다 보면 쉽지 않은 것이 ‘사소취대’이다. 작은.. 더보기 바둑 격언 속에 들어있는 인생의 의미(위기십결, 위기오득) (上편) '바둑판 안에 인생이 담겨 있다.' 라는 말은 바둑을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인생사 복잡 무쌍해 보이지만 한 판의 바둑과 신통히도 닮았다.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란 말에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 바둑 동네에서 회자되는 무수한 격언, 명구(名句)들이다. 반상(盤上)의 ‘공자말씀’들은 실제 사회에서도 삶의 지표로 훌륭히 적용된다. 강의 준비를 못한 인생 카운슬러 선생님들은 급한 대로 ‘바둑 격언집’ 들고 강의실 들어가도 절대 망신당하지 않을정도로 바둑판 안에는 무수한 인생의 가르침이 있다. 1. 일수불퇴 (一手不退)바둑 헌법 1조 1항은 ‘일수불퇴’부터 시작된다. 이건 격언이라기보다는 규정이지만, 거역 못할 엄격함을 담고 있다. 무를 수 없는 건 인생도 마찬가지란 점에서 둘은 시작부터 닮.. 더보기 역대 한국 바둑 1인자의 계보(이세돌, 신진서) -完- 마. 이세돌 (1983~ 현재) 전남 신안군에 위치한 비금도 도고리에서 태어난 이세돌은 살던 집이 약 1,500평 정도로 부유했다고 한다. 논을 메워 집을 지었고, 이웃 빈집을 사들여 텃밭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5살 때부터 그에게 직접 바둑을 가르친, 부친 이수오씨는 아마 5단으로 광주교대 졸업, 초등학교 교사로 10년간 근무했고 1998년 암으로 사망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쯤 이세돌은 아버지와 맞바둑을 두었고, 2학년 때 기력이 아버지를 완전히 넘어섰다고 한다. 이세돌은 2012년 발간된 자서전 『판을 엎어라』의 첫 머리에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대학 졸업 후 몇 년 간 교편을 잡았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고향 섬 비금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5남매.. 더보기 역대 한국 바둑 1인자의 계보(조훈현, 이창호) 이전 글에 이어서 1인자의 계보를 이어 왔던 바둑 기사들을 알아보자. 다. 조훈현 (1953~ 현재) 조훈현 9단 하면 떠오르는 것이 최연소 입단이다. 무려 9살이라는 나이에 프로에 입단 한것이다. 이제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에 무려 프로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바둑황제’로 불리는 조훈현은 그 칭호에 걸맞게 화려하기가 비할 데 없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62년 9살의 나이에 입단한 것 뿐만 아니라 입단한 지 약 6개월만인 이듬해 4월에 2단으로 승단, 다시 6개월 뒤인 1963년 10월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스승은 조남철과 조치훈, 그리고 김인 등의 스승인 기타니 미노루가 아닌 오청원과 하시모토 우타로의 스승인 세고에 켄사쿠였다. 1966년 일본기원에서 다.. 더보기 역대 한국 바둑 1인자의 계보(조남철 9단, 김인9단) 1. 역대 한국 바둑 1인자에은 어떠한 인물들이 있을까? 1). 한국 바둑을 이끌었던 천재적인 기사 한국 바둑계는 여타의 스포츠 분야와 유사하게 주로 한 사람의 천재적 스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한국바둑의 아버지’라 불리며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약 20년 간 1인자로 군림하던 조남철은 자신보다 스무 살 아래인 김인에게 1인자의 자리를 물려주었고, 그렇게 물려받은 자리를 김인은 그로부터 약 10년 뒤 열 살 아래인 조훈현에게 물려준다. 조훈현이 거의 모든 기전들을 독식하던 20여 년의 세월 동안 동갑내기 서봉수가 끈질기게 왕좌를 넘보았지만 ‘바둑황제’ 아성은 그의 제자 이창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했.. 더보기 바둑의 역사 9 (중국 3) 3. 응씨배의 등장과 한국 바둑의 위상녜웨이핑이 이끄는 중국 팀의 연이은 승리로 중국인들의 바둑에 대한 자신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대만의 사업가이자 40년대부터 바둑을 후원해 온 잉창치가 세계프로바둑대회의 아이디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은 이즈음이었다. 잉창치는 수많은 잡지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점을 강조한다. 오랜 시간 동안 일본은 경쟁자 없는 최강이었으나 이제 일본의 일류기사와 겨루어도 손색이 없는 중국인 기사들이 많아졌다. 여기에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만 출신 기사들, 린하이펑, 왕리청(王立誠), 왕밍완(王銘玩) 등이 가세하면 흥미진진한 세계대회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그 해, 4년 마다 한 번씩 개최된다는 점 때문에 바둑올림픽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제1.. 더보기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