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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격언 속에 들어있는 인생의 의미(위기십결, 위기오득) (上편) '바둑판 안에 인생이 담겨 있다.' 라는 말은 바둑을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인생사 복잡 무쌍해 보이지만 한 판의 바둑과 신통히도 닮았다.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란 말에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 바둑 동네에서 회자되는 무수한 격언, 명구(名句)들이다. 반상(盤上)의 ‘공자말씀’들은 실제 사회에서도 삶의 지표로 훌륭히 적용된다. 강의 준비를 못한 인생 카운슬러 선생님들은 급한 대로 ‘바둑 격언집’ 들고 강의실 들어가도 절대 망신당하지 않을정도로 바둑판 안에는 무수한 인생의 가르침이 있다. 1. 일수불퇴 (一手不退)바둑 헌법 1조 1항은 ‘일수불퇴’부터 시작된다. 이건 격언이라기보다는 규정이지만, 거역 못할 엄격함을 담고 있다. 무를 수 없는 건 인생도 마찬가지란 점에서 둘은 시작부터 닮.. 더보기
역대 한국 바둑 1인자의 계보(이세돌, 신진서) -完- 마. 이세돌 (1983~ 현재)     전남 신안군에 위치한 비금도 도고리에서 태어난 이세돌은 살던 집이 약 1,500평 정도로 부유했다고 한다. 논을 메워 집을 지었고, 이웃 빈집을 사들여 텃밭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5살 때부터 그에게 직접 바둑을 가르친, 부친 이수오씨는 아마 5단으로 광주교대 졸업, 초등학교 교사로 10년간 근무했고 1998년 암으로 사망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쯤 이세돌은 아버지와 맞바둑을 두었고, 2학년 때 기력이 아버지를 완전히 넘어섰다고 한다.   이세돌은 2012년 발간된 자서전 『판을 엎어라』의 첫 머리에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대학 졸업 후 몇 년 간 교편을 잡았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고향 섬 비금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5남매.. 더보기
역대 한국 바둑 1인자의 계보(조훈현, 이창호) 이전 글에 이어서 1인자의 계보를 이어 왔던 바둑 기사들을 알아보자. 다. 조훈현 (1953~ 현재)        조훈현 9단 하면 떠오르는 것이 최연소 입단이다. 무려 9살이라는 나이에 프로에 입단 한것이다. 이제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에 무려 프로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바둑황제’로 불리는 조훈현은 그 칭호에 걸맞게 화려하기가 비할 데 없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62년 9살의 나이에 입단한 것 뿐만 아니라 입단한 지 약 6개월만인 이듬해 4월에 2단으로 승단, 다시 6개월 뒤인 1963년 10월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스승은 조남철과 조치훈, 그리고 김인 등의 스승인 기타니 미노루가 아닌 오청원과 하시모토 우타로의 스승인 세고에 켄사쿠였다. 1966년 일본기원에서 다.. 더보기
역대 한국 바둑 1인자의 계보(조남철 9단, 김인9단) 1. 역대 한국 바둑 1인자에은 어떠한 인물들이 있을까? 1). 한국 바둑을 이끌었던 천재적인 기사                                         한국 바둑계는 여타의 스포츠 분야와 유사하게 주로 한 사람의 천재적 스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한국바둑의 아버지’라 불리며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약 20년 간 1인자로 군림하던 조남철은 자신보다 스무 살 아래인 김인에게 1인자의 자리를 물려주었고, 그렇게 물려받은 자리를 김인은 그로부터 약 10년 뒤 열 살 아래인 조훈현에게 물려준다. 조훈현이 거의 모든 기전들을 독식하던 20여 년의 세월 동안 동갑내기 서봉수가 끈질기게 왕좌를 넘보았지만 ‘바둑황제’ 아성은 그의 제자 이창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했.. 더보기
바둑의 역사 9 (중국 3) 3. 응씨배의 등장과 한국 바둑의 위상녜웨이핑이 이끄는 중국 팀의 연이은 승리로 중국인들의 바둑에 대한 자신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대만의 사업가이자 40년대부터 바둑을 후원해 온 잉창치가 세계프로바둑대회의 아이디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은 이즈음이었다. 잉창치는 수많은 잡지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점을 강조한다. 오랜 시간 동안 일본은 경쟁자 없는 최강이었으나 이제 일본의 일류기사와 겨루어도 손색이 없는 중국인 기사들이 많아졌다. 여기에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만 출신 기사들, 린하이펑, 왕리청(王立誠), 왕밍완(王銘玩) 등이 가세하면 흥미진진한 세계대회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그 해, 4년 마다 한 번씩 개최된다는 점 때문에 바둑올림픽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제1.. 더보기
바둑의 역사 8 ( 중국 2) 가. 현대 중국 바둑의 흐름  2. 본격적인 중일 바둑 교류의 흐름  본격적인 중일 간의 바둑교류는 1959년 중국을 방문한 일본 자민당 참의원 마쓰무라(松村謙三)4)와 천이의 회담으로 성사되었다. 마쓰무라가 “6억 중국국민에게 바둑을 보급하기 위해서라면 중국에 뼈를 묻겠다”라는 세고에(瀨越憲作)5)의 말을 당시 부총리였던 천이에게 전하자, “바둑은 정치와는 일절 무관한 것으로 일본 측에서 교류를 해 준다면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회답하였다 한다. 이리하여 일본의 바둑 방문사절이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것이 1960년, 중국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되기 12년 전의 일이다. 4) 마쓰무라 켄죠(松村謙三, 1883~1971)5) 세고에 겐사쿠(1889~1972). 일본 프로기사로, 중국 천재 바둑기사 .. 더보기
바둑의 역사 7 ( 중국 편) 가. 현대 중국 바둑의 흐름   1. 일본과의 교류를 통한 중국 바둑의 발전    중국 바둑은 그 역사가 깊은만큼 강자들이 즐비하고, 바둑인구 역시 한국과 일본이 상대가 안될정도로 많다.  2013년에는 개인전으로 치러진 세계대회 6개의 우승컵을 모두 가져갔고, 2014년, 2015년 2년 연속으로 단체전 세계대회인 농심배에서도 우승을 거두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약 10년 간 부동의 세계최강이었던 한국바둑이 200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중국에게 위협을 받더니, 그로부터 약 10년 만에 최강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다른 많은 분야에서처럼 바둑에서도 일본▷한국▷중국의 순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중국이 바둑에서 헤게모니를 잡은 것이 역사상 처음 있는 .. 더보기
바둑의 역사 6 (일본편 2) 나. 일본 바둑의 역사   1. 근대적 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들  일본에는 바둑이 전문화된 역사가 오래된 만큼 유명한 기사들도 많다.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3명의 일본 통일의 영웅들에게 바둑을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초대 혼인보 산사, 고금을 통틀어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고 일컬어질 뿐만 아니라 과거 힘에 의거한 바둑에서 합리적 계산을 통한 근대적 바둑으로의 전환을 주도하였고, 단위제도를 창안한 것으로 알려진 제4대 혼인보 도사쿠, 19세에 혼인보의 후계자로 지명되고 이후 13년 간 총 19국의 오시로고에서 전승을 거두었으며 ‘슈사쿠 포석’이라는 근대 포석의 기초를 마련한, 만화 『고스트 바둑왕』에서 ‘사이’가 히카루 이전에 머물렀던 기사 슈사쿠 등 모두 소개하자..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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